G-5MYML44SS8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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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정보/지식

일제강점기

by 예쁘미네 2023. 1. 5.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국 식민화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고 을사조약 체결 후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설치하여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부임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피탈이 이루어졌고 같은 해 9월 10일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3·1 운동 직후 문화통치라는 기만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으나 실제로는 헌병경찰제를 실시하면서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계속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 갈등이 심화되었고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정책을 적극 전개하면서 병참기지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한반도 내 물적 자원 및 인적 자원 수탈도 강화되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 수탈뿐만 아니라 각종 경제수탈책을 강행하였는데 징용령·징병령·정신대근무령 등을 공포하여 한국인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였으며 군수공업 위주의 전시통제경제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물자부족현상 타개를 명분으로 공출제도를 더욱 강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식량 배급제도로 미곡공출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심지어 놋그릇까지도 빼앗아 갔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본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친일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연예인과 정치인들은 자신의 SNS 계정에 "일본 덕분에"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도 국민들은 분노하는가? 

바로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 1945년 광복 이전까지의 35년간의 기간 동안 수많은 독립투사 및 애국자들이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국민으로서 과거사 청산 문제만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 시대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기간을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 통치 초기 무단통치 방식을 취하며 조선인들을 억압했고 민족운동 세력 또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3·1 운동이라는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문화통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친일파 양성 및 각종 회유책을 통해 조선인 스스로 분열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도 소용없었는지 1930년대 후반부터는 내선일체 사상을 강조하며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 창씨개명제도나 신사참배 강요 등 수많은 악법들이 생겨났고 한국어 교육 금지 조치까지도 내려졌다. 

심지어 1938년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인적·물적 자원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모두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한편 1940년대 초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한반도 전역을 군사기지화하였고 징병제 실시 후 여성들에게도 위안부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미국과의 전면전이 예상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국내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거나 투옥시켰다. 

그러다 종전 직전 소련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미군정청 설치 직후 남한 지역에만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해방 당시 해외에 있던 동포 다수가 귀국하지 못하고 북한지역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기나긴 시간 동안 나라 잃은 설움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선조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의 희생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심이자 본받아야 할 자세 아닐까?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자 광복절 74주년이 되는 해다. 

따라서 오늘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1919년 2월 1일 고종 황제 장례식 당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그날 밤 경성 시내 곳곳에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목 놓아 외쳤다. 

그러자 당황한 일경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이튿날 아침 종로 거리 한복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날 사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행진을 벌였는데 경찰이 해산 명령을 내리자 분노한 일부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압이 계속되자 격분한 민중들은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과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울에서만 무려 5천여 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이중 7백여 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뿐만 아니라 평양, 원산, 함흥, 대구, 부산 등지에서도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다.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항일 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오후 6시 30분쯤 여운형, 김규식, 장덕수 등 지도부가 주도하여 신한청년당 당원 200여 명이 집결했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아쉽게도 불발탄이었지만 충격파는 상당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는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우선 관련자 전원을 석방하였으며 주동자급에게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을 선고했다. 아울러 외교관 추방조치와 함께 언론 통제 강화 방침을 발표했다. 

물론 겉으로는 유화 제스처를 취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듬해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회의에서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대한제국은 국운이 다해가는 상황이었고 백성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조차 힘든 처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 마저 박탈당하자 고종 황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계기로 강제 퇴위 당했다. 

이어 순종 황제가 즉위했으나 허울뿐인 왕이었을 뿐 실권은 없었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되었고 나라 잃은 슬픔에 온 국민이 통곡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35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조약 체결 과정에서의 불법성과 무효 여부다.

먼저 국제법상으로는 원천무효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과정에서 연합국 측이 카이로 선언(1943)과 포츠담 선언(1945)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나라에게는 아무런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맺어진 조약일지라도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음으로 절차상의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우선 통감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데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만이 서명했을 뿐 나머지 대신들은 배제됐다.

또 비준서도 교환되지 않았고 정식 발효되기 이전에 군대해산 명령이 내려진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합병조약 자체가 불평등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전문 11조로 구성된 내용 가운데 5조에서는 병합 실행 시 양국 간 협의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7조에선 황실 재산 처분권을 강탈했으며 9조에선 사법권 위임 조항을 두어 주권 침탈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핵심 쟁점은 대략 위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강대국 사이에서 힘없는 약소국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다만 분명한 건 오늘날 관점에서 봤을 때 결코 합당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웅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와 가족들을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온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정성화). 동지들과 함께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으로조국 독립의 결의를 다진 안중근은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3년 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피로 맹세한다.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안중근.오랜 동지 ‘우덕순’(조재윤), 명사수 ‘조도선’(배정남),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독립군을 보살피는 동지 ‘마진주’(박진주)와 함께 거사를 준비한다. 한편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이토 히로부미에게 접근해적진 한복판에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수집하던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는이토 히로부미가 곧 러시아와의 회담을 위해하얼빈을 찾는다는 일급 기밀을 다급히 전한다.드디어 1909년 10월 26일,이날만을 기다리던 안중근은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전쟁 포로가 아닌 살인의 죄목으로,조선이 아닌 일본 법정에 서게 되는데…누가 죄인인가, 누가 영웅인가!
평점
9.2 (2022.12.21 개봉)
감독
윤제균
출연
정성화, 김고은, 나문희, 조재윤, 배정남, 이현우, 박진주, 허유리, 류인영
 
영웅
 
평점
9.6
기간
2022.12.21(수)~2023.02.28(화)
장소
서울,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
출연
정성화, 양준모, 민우혁, 김도형, 서영주, 최민철, 정재은, 린지, 윤석원, 김늘봄, 최종선, 김재현, 김도현, 임규형, 윤진솔, 오윤서, 황이건, 서종원, 남궁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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